폭풍 작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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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폭풍 작전은 1950년 6월 25일 북한의 기습 남침으로 시작된 한국 전쟁을 의미한다. 이오시프 스탈린의 지원을 받은 김일성은 무력을 통한 한반도 통일을 목표로, 1950년 1월 스탈린의 침공 지원 의사를 확인하고, 4월 모스크바에서 침공 계획을 수립했다. 6월 25일 새벽, 조선인민군은 38선 전역에서 남한을 공격했으며, 국군은 초기 방어에 어려움을 겪었다. 유엔 안전 보장 이사회는 북한의 침략을 규탄하고, 미국을 비롯한 국제 사회는 한국에 군사적 지원을 제공하기로 결정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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폭풍 작전 - [전쟁]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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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요 | |
분쟁 | 6.25 전쟁 |
날짜 | 1950년 6월 25일 - 1950년 7월 31일 |
장소 | 북위 38도 이남, 대한해협 |
결과 |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전술적 승리 대한민국 국군의 전략적 후퇴 서울 함락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한반도 대부분 점령 대한민국의 지연전 성공 춘천, 대한해협, 옥계에서 승리 조선인민군 제2군단 궤멸 유엔군 및 미국 참전 유엔 안전보장이사회 결의안 제84호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초기 목표 달성 실패 |
교전 세력 | |
교전국 1 | {{기호 없는 목록 |
교전국 2 | {{기호 없는 목록 |
지휘관 | |
지휘관 1 | {{기호 없는 목록 |
지휘관 2 | {{기호 없는 목록 |
군사 정보 | |
병력 규모 (북한) | 198,380명 |
병력 규모 (한국) | 105,752명 |
기타 정보 | |
관련 작전 | Campaignbox Korean War |
다른 뜻 | 보스니아 전쟁 기간 진행된 작전, 폭풍 작전 (1995년) |
러시아어 명칭 | Летнее наступление КНА (Letneye nastupleniye KNA) |
영어 명칭 | Operation Pokpung/Storm |
2. 배경
이오시프 스탈린의 영향으로 김일성은 남침 시기를 결정했고,[3] 이승만과 김일성은 모두 한반도 통일을 원했지만, 김일성은 무력을 통한 통일을 추구했다. 김일성은 스탈린의 지원 없이는 목표를 달성할 수 없었다.[4]
2. 1. 미소 냉전과 한반도 분단
이오시프 스탈린의 영향으로 김일성은 남침 시기를 결정하게 되었다.[3] 김일성과 이승만 모두 한반도 통일을 원했지만, 김일성은 무력을 통해 통일을 이루려 했다. 김일성은 스탈린의 지원 없이는 이러한 목표를 달성할 수 없었다.[4] 1950년 1월 30일, 스탈린은 테렌티 시티코프에게 침공 계획을 돕겠다고 밝혔다. 스탈린은 김일성이 장기적인 전투의 위험을 최소화할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한다고 말했다.[3] 1950년 4월까지 김일성은 여러 차례 침공을 요청했지만, 스탈린은 극동 지역에 유리한 전술적 상황이 나타날 때까지 허락하지 않았다.[4]1950년 3월부터 조선인민군(KPA)은 무장을 강화하고 남한을 공격하기 위해 병력을 재배치했다. 5월 16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과 소련의 장교들은 전쟁을 위한 최종 점검을 시작했다.[5]
김일성은 1950년 4월 모스크바에서 스탈린을 만나 침공 계획을 세웠다. 스탈린은 중국도 동의한다는 조건으로 계획을 허가했다.[3] 5월 13일 김일성은 마오쩌둥을 만나기 위해 베이징으로 갔다. 5월 14일, 마오는 스탈린의 전보를 확인하고 북한의 침공을 승인했다.[3] 스탈린은 4월 모스크바 회담 전에 바실리예프 중장을 파견하여 침공 계획을 준비하게 했다. 5월 29일 바실리예프와 강건 인민군 총참모장은 침공 계획을 확정했다.[3]
6월 10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인민무력성은 모든 사단 및 여단 지휘관들을 평양으로 소집하여 회의를 열었다.[5] 강건은 6월 23일까지 방어 작전으로 위장하여 공세 작전을 준비하라고 명령했다. 6월 11일 인민군은 두 개의 군단으로 재편성되었고, 후방에 배치된 사단들은 38선에서 북쪽으로 10~15km까지 이동하기 시작했다.[5] 인민군 제2사단의 선봉대는 같은 날 금화로 이동했다. 사단 전체는 6월 14일까지 금화에 배치되었다.[6] 6월 23일까지 침공에 참여한 모든 인민군 병력은 38선 주변에 배치되었다.[3]
6월 18일 인민무력성은 사단 지휘관들에게 대한민국 국군 병력의 위치와 지형 정보를 수집하기 위한 정찰 명령 제1호를 내렸다. 6월 22일 정찰과 재편성이 완료되고 스탈린의 승인을 받은 후, 소련 군사 고문들은 인민무력성에 전투 명령 제1호를 각 사단에 보내라고 지시했다.[5]
한편, 김일성은 스탈린에게 전쟁이 6월 25일에 시작될 것이라고 알렸고, 스탈린은 그 계획에 동의했다. 예정대로 인민군은 작전을 시작하여 1950년 6월 25일 04:00 KST에 38선을 넘었다.
2. 2. 김일성과 이승만의 통일관
김일성과 대한민국의 지도자 이승만은 모두 한반도 통일을 원했다. 김일성은 무력을 통해 공산주의 통일을 달성하고자 했으며, 이를 위해 이오시프 스탈린의 지원이 필요했다.[4] 반면 이승만은 북진 통일을 주장하여 김일성과 대립했다. 1950년 1월 30일, 스탈린은 테렌티 시티코프에게 김일성의 침공 계획을 돕겠다고 밝혔다. 스탈린은 김일성이 남한을 점령하기 위해 장기적인 전투의 위험을 최소화해야 한다고 강조했다.[3]2. 3. 스탈린의 지원과 마오쩌둥의 동의
김일성은 1950년 4월 모스크바에서 이오시프 스탈린을 만나 남침 계획을 논의했다. 스탈린은 중화인민공화국의 마오쩌둥이 동의한다는 조건으로 이 계획을 승인했다.[3] 김일성은 5월 13일 베이징에서 마오쩌둥을 만났고, 5월 14일 마오쩌둥은 스탈린의 전보를 확인하고 남침을 승인했다.[3]3. 전쟁 발발 이전 북한의 군사적 준비
1950년 3월부터 조선인민군은 무장을 강화하고 대한민국을 공격하기 위한 준비로 군대를 재배치하며 본격적으로 남침 준비를 시작했다.[17] 6월 23일, 조선인민군 총참모장 강건은 모든 군대에 6월 23일까지 공격 작전 준비를 마치라고 지시했다.[17]
한편, 김일성은 이오시프 스탈린에게 6월 25일에 전쟁을 시작할 것이라고 알렸고, 스탈린은 이를 승인했다.
3. 1. 군비 증강 및 병력 재배치
1950년 3월부터 조선인민군은 무장을 강화하고 대한민국을 공격하기 위한 준비로 군대를 재배치했다. 5월 16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과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 연방(소련)의 사무관들이 전쟁에 대한 마지막 토의를 시작했고, 이후 북한 국방총리는 고위급 회담을 개최했다.[17] 6월 10일, 북한 국방총리는 비밀리에 모든 사단 및 여단 사령관들을 평양으로 소집했다.[17]6월 11일, 조선인민군은 2개의 군단으로 재편성되었고, 사단들은 38선 이북 10~15km 지점에 배치되었다.[17] 6월 18일, 인민 국방총리는 정찰명령 제1호를 발령해 각 사단에 대한민국 국군의 위치 및 활동 범위에 대한 정보를 수집하도록 지시했다.[17] 6월 22일, 재배치 및 재편성이 완료되고 이오시프 스탈린의 침공 승인을 받은 후, 소련 군사고문관들은 인민 국방총리에게 전투 명령 1호를 발령하라고 지시했다.[17]
조선인민군의 침공은 소련제 T-34 전차를 앞세워 진행되었다. T-34 전차는 85mm 포와 견고한 장갑을 갖추고 있어, 전차가 없고 대전차포가 부족했던 대한민국 국군에게는 큰 위협이었다.[11] T-34 전차는 29톤으로 한국 철도 교량의 제한을 견딜 수 있을 만큼 가벼웠다.[6][11] 150대의 소련제 야코블레프 Yak-9 전투기, 일리우신 Il-10 공격 폭격기 및 야코블레프 Yak-11 훈련기가 공중 지원을 제공했다.[11] 이 항공기들은 근접 항공 지원을 제공했으며, 서울과 전략적 위치를 폭격했다.[11]
3. 2. 38선 인근 병력 배치
1950년 6월 11일, 조선인민군은 2개의 군단으로 재편성되었고, 부대들을 북위 38도 이북 10~15km 전선에 배치했다.[17] 이는 6월 23일까지 모든 군대에 공격 준비를 마치라는 강건 총참모장의 지시에 따른 것이었다.[17] 6월 18일, 인민군 총사령부는 정찰명령 제1호를 발령하여 각 사단에 대한민국 국군의 위치 및 활동 범위에 대한 정보를 수집하도록 지시했다.[17]3. 3. 김일성의 전쟁 도발 관련 발언
김일성은 전쟁이 시작되자 긴급 정부 회의를 소집하여 조선로동당 당원들에게 "동지들, 배반자 이승만의 군대(대한민국 국군)가 38선(북위 38도)을 넘어 우리 공화국(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에 도전하기 위해 전면적인 침공을 시작했소."라고 주장했다.[17] 또한 김일성은 6월 26일 오전 9시 20분에 방송을 통해 남한이 해주 지역에서 북한을 공격하여 반격을 유발했다고 주장했다.[7]4. 전쟁 초기 상황 (1950년 6월 25일 ~ )
1950년 6월 24일, 북한군은 공격 개시 위치에 배치하라는 명령을 받았다.[6] 6월 25일, 펜타곤은 북한군이 여러 지역에서 남한을 침공했다는 보고를 받았다. 이 보고는 오전 4시 40분 옹진에 대한 북한군의 포격으로 전투가 시작되었다고 알렸다.[10]
북한군의 침공과 초기 진격, 국군의 대응, 서울 함락, 그리고 상륙 작전에 대한 자세한 내용은 하위 섹션에서 다루고 있으므로, 여기서는 간략하게 요약만 제시한다.
소련 보고서는 조선인민군 작전의 부적절성을 강조했다. 통신이 비효율적이었고, 참모는 전투를 제대로 지휘하지 못했으며, 부대 지휘관은 상급 참모로부터 명령을 받지 못했다. 보고서는 조선인민군 지휘부가 전투 경험이 없다고 밝혔다. 그러나 조선인민군 병사들은 열성적이었고 임무 완수에 헌신적이었다.[6]
북한 주민들은 침공 소식에 긍정적인 반응을 보이며 북한 정부와 조선인민군에 대한 강한 믿음을 보였다.[6]
4. 1. 북한군의 기습 남침
1950년 6월 25일 새벽 4시, 북한군은 옹진에 대한 포격을 시작으로 38선 전역에서 기습 남침을 감행했다.[10] 조선인민군(KPA)은 빠르게 3~5km를 전진했고, 대한민국 육군(ROKA)은 옹진, 개성, 서울 방향에서 저항했지만, 옹진, 개성, 신현리는 첫날 함락되었다.[10][6] 조선인민군은 춘천 방향으로 12km, 동해안을 따라 8km 전진했다.[6]오전 5시 25분에는 강릉 남쪽 해안에서 두 차례의 상륙이 있었다. 고려 지역에는 해군 보병 2개 대대와 1,000명의 유격대가, 우르친 지역에는 600명의 유격대가 상륙하여 우르친 시를 함락시켰다.[6]
북한군의 침공에는 소련제 T-34 중형 전차가 선두에 섰다. T-34는 85mm 포와 견고한 장갑을 갖추고 있어, 대전차 무기가 부족했던 대한민국 육군에게는 큰 위협이었다.[11] 150대의 소련제 야코블레프 Yak-9 전투기, 일리우신 Il-10 공격 폭격기, 야코블레프 Yak-11 훈련기가 근접 항공 지원을 제공하며 서울과 전략적 위치를 폭격했다.[11]
6월 26일, 조선인민군은 남쪽으로 계속 전진하여 개성과 옹진반도를 점령했다. 제1, 4사단은 동두천과 문산을, 제2사단은 시운센을 점령했다. 제6사단은 김포 비행장을 점령했고, 상륙 부대는 투부이리 항구를 점령했다.[6] 주력 부대는 의정부 회랑을 통해 서울로 진격했다.[11]
대한민국 군대는 항공기와 탱크가 부족했고, 병력의 탈영도 심각했다.[10][11] 6월 28일, 대한민국 육군은 북한군의 진격을 늦추기 위해 한강대교를 폭파했지만, 이로 인해 남한 난민 사상자가 발생하고 제5사단이 고립되었다. 조선인민군은 그날 늦게 한강을 건너 서울을 점령했다.[8]
소련 보고서는 조선인민군 작전의 통신 비효율성, 지휘부의 전투 경험 부족, 전술적 미숙함을 지적했지만, 조선인민군 병사들은 열성적이었다고 평가했다.[6] 북한 주민들은 침공 소식에 긍정적인 반응을 보이며 북한 정부와 조선인민군에 대한 강한 믿음을 보였다.[6]
4. 2. 국군의 대응과 한계
1950년 6월 25일, 조선인민군(KPA)의 기습적인 남침으로 한국 전쟁이 시작되었다. 펜타곤은 북한군이 여러 지역에서 남한을 침공했다는 보고를 받았으며, 오전 4시 40분 옹진에 대한 포격으로 전투가 시작되었다.[10] 조선인민군은 초기 3시간 만에 남한 영토로 3~5km 전진했다.[6]대한민국 육군(ROKA)은 옹진, 개성, 서울 방향에서 강력하게 저항했지만, 옹진, 개성, 신현리는 첫날 함락되었다.[10] 조선인민군은 춘천 방향으로 12km, 동해안을 따라 8km 전진했다.[6]
조선인민군의 침공에는 소련제 T-34 중형 전차가 선두에 섰다. T-34는 85mm 포를 장착하고 상당한 수준의 장갑을 갖추고 있어, 전차가 없고 대전차포가 부족했던 대한민국 육군에게는 큰 위협이었다.[11] 또한 150대의 소련제 야코블레프 Yak-9 전투기, 일리우신 Il-10 공격 폭격기, 야코블레프 Yak-11 훈련기가 근접 항공 지원을 제공하며 서울과 전략적 위치를 폭격했다.[11]
6월 26일에도 조선인민군은 계속 남쪽으로 진격하여 개성 및 옹진 반도를 점령하고, 동두천, 문산, 춘천 등을 점령했다.[6] 주력 부대는 의정부 회랑을 통해 서울로 진격했다.[11]
대한민국 군대는 항공기와 탱크가 부족했고, 65,000명의 전투 병력과 33,000명의 지원 병력 중 상당수가 탈영하기 시작했다.[10][11] 6월 28일, 대한민국 육군은 조선인민군의 진격을 늦추기 위해 한강대교를 폭파했지만, 이로 인해 남한 난민 사상자가 발생하고 대한민국 육군 제5사단이 고립되었다.[8] 결국 조선인민군은 그날 늦게 한강을 건너 서울을 점령했다.[8]
소련 보고서는 조선인민군 작전의 문제점을 지적했다. 통신이 비효율적이었고, 참모는 전투를 제대로 지휘하지 못했으며, 부대 지휘관은 상급 참모로부터 명령을 받지 못했다. 또한, 조선인민군 지휘부는 전투 경험이 부족했고, 탱크와 포병의 전술적 사용도 미숙했다.[6]
4. 3. 서울 함락 (6월 28일)
조선인민군한국어(KPA)은 소련제 T-34 중형 전차를 앞세워 1950년 6월 25일 남침을 시작했다.[11] T-34 전차는 85mm 포를 장착하고 중간 정도의 장갑을 갖추고 있었는데, 당시 대한민국 육군(ROKA)은 전차가 거의 없었고 T-34 전차의 장갑을 뚫을 수 있는 대전차포도 부족했기 때문에 속수무책이었다.[6][11] T-34 전차의 무게는 29ton으로, 한국 철도 교량의 제한 무게를 견딜 수 있었다.[6][11] 150대의 소련제 야코블레프 Yak-9 전투기, 일리우신 Il-10 공격 폭격기, 야코블레프 Yak-11 훈련기가 근접 항공 지원을 제공하며 서울과 전략적 위치를 폭격했다.[11]전투는 6월 26일에도 계속되어 조선인민군한국어은 남쪽으로 계속 진격했다. 개성 및 옹진 반도가 정리되었다. 제1사단과 제4사단은 동두천과 문산을 점령했고, 제2사단은 시운센을 점령했다. 제6사단은 만을 건너 김포 비행장 방향 지점을 점령했다. 주력 부대는 의정부 회랑을 통해 서울로 진격했다.[11]
대한민국 육군은 침공에 맞설 충분한 항공기나 전차가 없었다.[10] 65,000명의 전투 병력과 33,000명의 지원 병력으로 구성된 대한민국 육군의 상당수가 탈영하기 시작했다.[11] 6월 28일, 대한민국 육군은 조선인민군한국어의 진격을 늦추기 위해 한강대교를 폭파했다.[8] 그러나 이 폭파로 인해 남한 피난민 사상자가 발생했고, 대한민국 육군 제5사단이 고립되었다.[8] 조선인민군한국어은 그날 늦게 강을 건너 서울을 점령했다.[8]
4. 4. 상륙 작전
1950년 6월 25일 오전 5시 25분, 강릉 남쪽 해안에서 두 차례의 상륙이 발생했다. 한 상륙 작전은 고려 지역에서 해군 보병 2개 대대와 1,000명의 유격대로 구성되었고, 다른 상륙 작전은 울진 지역에서 600명의 유격대로 구성되었다.[6] 우르친 시가 함락되었고, 대한민국 군대는 북한 해군과 교전했지만 상륙은 성공했다.[6] 상륙 작전 부대는 진격하여 투부이리 항구를 점령했다.[6]4. 5. 북한군 (조선인민군)
군단 | 사단 | 연대 |
---|---|---|
제1군단 | 제1보병사단 | |
제3보병사단 | ||
제4보병사단 | ||
제6보병사단 | ||
제2군단 | 제2보병사단 | |
제5보병사단 | ||
제7보병사단 | ||
제8보병사단 | ||
제15보병사단 | ||
제9보병사단 | ||
제10보병사단 | ||
제13보병사단 | ||
제105전차여단 | ||
제107전차연대 | ||
제109전차연대 | ||
제203전차연대 | ||
제206기계화연대 | ||
제549보병연대 | ||
제766보병연대 | ||
제1경비여단 | ||
제3경비여단 |
4. 6. 국군 (대한민국 국군)
사단 | 예하 연대 |
---|---|
수도사단 | 제3보병연대, 제18보병연대 |
제1보병사단 | 제11보병연대, 제12보병연대, 제13보병연대 |
제2보병사단 | 제5보병연대, 제16보병연대, 제25보병연대 |
제3보병사단 | 제18보병연대, 제22보병연대, 제23보병연대 |
제5보병사단 | 제15보병연대, 제20보병연대 |
제6보병사단 | 제2보병연대, 제7보병연대, 제19보병연대 |
제7보병사단 | 제1보병연대, 제9보병연대 |
제8보병사단 | 제10보병연대, 제21보병연대, 제17보병연대 |
5. 전쟁에 대한 상반된 주장
한국 전쟁 발발 당시 초기 상황에 대해 남북 양측은 서로 다른 주장을 펼쳤다.[7] 김일성은 조선로동당원들에게 남한의 침략 사실을 알렸으나,[5] 유엔 한국 위원단은 호주 군사 참관인들의 보고서를 통해 대한민국 국군이 방어 목적으로 조직되었으며, 북한의 침공은 군사적으로 불가능하다고 반박했다.[8][9] 김일성은 방송을 통해 남한이 먼저 공격했다는 주장을 펼쳤지만, 유엔 한국 위원단은 이를 거부했다.[7]
당시 미국 언론은 이 사건을 북한의 침략 행위로 보도하며 냉전 시기 정치적 분열을 심화시켰다. 뉴욕 타임스는 이 사건을 "침략 행위", "무법한 행위"로 묘사하며, 소련을 배후로 지목했다.[12]
5. 1. 대한민국의 입장
대한민국은 북한의 기습 남침을 명백한 불법 침략 행위로 규정하고, 국제사회에 북한의 침략 행위를 규탄했다. 유엔 한국 위원단의 보고서는 대한민국 국군이 전적으로 방어를 위해 조직되었으며, 북한군에 대한 대규모 공격을 수행할 여건이 아니라고 주장했다.[9] 특히 장갑, 항공 지원 및 중포의 부재로 인해 대한민국 육군의 불충분한 자원은 남한의 북한 침공을 군사적으로 불가능하게 만들었다.[9]하지만 북한의 김일성은 6월 26일 방송에서 남한이 해주 지역에서 북한을 공격하여 반격을 유발했다고 주장했다.[7] 그러나 유엔 한국 위원단은 북한의 주장을 만장일치로 거부했다.[7]
5. 2. 북한의 입장
김일성은 조선로동당원들에게 "반역자 이승만의 군대가 38선을 넘어 우리 북쪽 공화국에 도전하기 위해 전면적인 침략을 시작했다"고 말했다.[5] 그는 6월 26일 방송에서 남한이 해주 지역에서 북한을 공격하여 반격을 유발했다고 주장했다.[7]북한은 공식적인 한국 전쟁 설명에서 이 전투를 "걸출하고 훌륭한 승리"라고 묘사하며, "인민의 적"에 대한 반제국주의적 방어 조치였다고 주장한다. 또한, 북한은 미국의 제국주의자들이 6월 25일 새벽, 10만 명 이상의 남한 군인들이 북한 영토 2km까지 침투하여 북한 주민을 정복하려 하면서, 남한군으로 하여금 북한을 기습 침공하도록 유도했다고 주장한다. 이 보고서는 남한군을 "침략적이고 제국주의적인" 미국의 "꼭두각시"라고 칭하며 "국가와 국민이 심각한 위험에 직면했다"고 언급하고 있다.[13]
6. 국제사회의 반응과 참전
1950년 6월 30일, 미국 대통령 해리 S. 트루먼은 성명을 통해 북한의 남침이 태평양 지역과 미국에 대한 공산주의의 위협을 증가시켰다고 밝혔다. 트루먼 대통령은 북한의 침공에 대응하여 미국이 한국에 공군과 육군 병력을 지원하도록 명령했다. 또한, 미국 제7함대에 포르모사에 대한 어떠한 공격도 막도록 명령했으며, 필리핀에 주둔한 미군 병력을 증강시켰다.[14]
유엔 안전 보장 이사회 (UNSC)는 북한의 침공으로 인해 유엔 안전 보장 이사회 결의안 84를 통과시켰다. 이 결의안은 북한군과 참여 국가에 대한 작전에 유엔 깃발을 사용할 수 있도록 승인했으며, 회원국들에게 북한의 공격을 격퇴하고 세계 평화와 안보를 회복하기 위해 대한민국에 지원을 제공할 것을 권고했다.[15]
6. 1. 유엔 안전보장이사회 결의
유엔 안전 보장 이사회는 북한의 남침을 침략 행위로 규정하고, 유엔 회원국들에게 대한민국의 군사적 지원을 촉구하는 유엔 안전 보장 이사회 결의안 84를 통과시켰다. 이 결의안은 북한군과 참여 국가에 대한 작전에 유엔 깃발을 사용할 수 있도록 승인했다. 유엔 안전 보장 이사회는 회원국들에게 북한의 공격을 격퇴하고 세계 평화와 안보를 회복하기 위해 대한민국에 지원을 제공할 것을 권고했다.[15]6. 2. 미국의 참전 결정
1950년 6월 30일, 미국 대통령 해리 S. 트루먼은 성명을 발표하여, 북한의 남침이 태평양 지역과 미국에 대한 공산주의의 위협을 증가시켰다고 밝혔다. 트루먼은 북한의 침공에 대응하여 미국이 한국에 공군과 육군 병력을 지원하도록 명령했다. 또한, 미국 제7함대에 포르모사에 대한 어떠한 공격도 막도록 명령했으며, 필리핀에 주둔한 미군 병력을 증강시켰다.[14]유엔 안전 보장 이사회(UNSC)는 북한의 침공으로 인해 유엔 안전 보장 이사회 결의안 84를 통과시켰다. 이 결의안은 북한군과 참여 국가에 대한 작전에 유엔 깃발을 사용할 수 있도록 승인했다. 유엔 안보리는 회원국들에게 북한의 공격을 격퇴하고 세계 평화와 안보를 회복하기 위해 대한민국에 지원을 제공할 것을 권고했다.[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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